용의자 X (Perfect Number, 2012)
감독: 방은진
주연: 류승범, 이요원, 조진웅
서비스: 넷플릭스
간단소개: 화선은 조카와 단 둘이 단란하게 살고 있다. 그녀에게 전남편이 찾아와 폭력을 휘두르고, 화선과 윤아는 의도치 않게 그를 죽이고 만다. 혼란스러워 하는 그들에게 옆집에 살던 조용한 수학선생 석고가 찾아와서 그들을 구원해 줄
제안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본에서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입니다. 한, 중, 일 삼국에서 영화화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흥행, 인기, 평론 등 다양한 면에서 인정을 받은 명작입니다. 소설만 읽었었는데,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은 김에 일본 원작과 한국판 리메이크작을 둘다 봤습니다. 한국판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ㅠ
글에는 일본 원작, 한국 리메이크작 모두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말과 트릭의 내용까지 전부 담겨 있습니다.
| 차갑고 냉정한 범죄 이야기
'용의자 X'는 살인사건을 둘러싼 모녀(또는 이모와 조카)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화선(이요원)은 도시락가게에서 일합니다. 조카와 단 둘이 살고 있는데, 어느날 폭력적인 전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화선을 또 때립니다.
조카인 윤아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전남편을 막으려다 화선과 윤아는 그를 죽이게 됩니다. 자수를 해야 하나 불안하고 무섭고 하는 와중에, 옆집에 살고 있는 수학선생 석고(류승범)이 벨을 누릅니다.
용의자 X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화선은 전남편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석고는 그들을 도울 것처럼 나서는 것 같습니다. 이 살인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영화의 초중반을 끌고가는 힘입니다.
시체가 발견되고, 경찰은 수사에 들어갑니다. 전부인인 화선에게도 경찰이 찾아와서 질문을 하고 조사를 합니다만, 화선은 그날 조카와 영화를 보고 있었고, 모든 증거가 그녀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었습니다.
화선과 조카 윤아는 석고가 시키는대로 행동했을 뿐이었습니다. 거짓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었던 일을 대답했는데도 살인으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라는 미스터리와 석고와 화선을 둘러싼 인물간의 감정. 이 두 기둥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원작도 탄탄하고, 연기력이 있는 배우들까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판에는 '갈릴레오'가 없었습니다.
| 없어진 갈릴레오, 긴장없는 미스터리
살인사건이 났고,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잡히지 않은 범인. 해답은 경찰의 수사방향,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다른 날짜로
돌린 석고의 계획이었습니다.
석고는 원인과 결과, 경찰의 수사 방향등을 특정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선과 조카 윤아에게 의심이 가지 않도록 상황을 만들려 했습니다. 거짓말 탐지기, 탐문, 증거, 증인 등. 어떤 수사결과에서도 화선이 살인사건에 연루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결국 자신이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범행이 일어난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버립니다. 그 시간대를 경찰에게 남겨준 것이지요.
일본판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천재 수학자가 만든 이 '아무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천재 물리학자 '갈릴레오' 유카와가
한겹식 풀어나갑니다. 그리고 이쪽은 교수님은 카리스마와 외모까지 겸비한 당대 최고 탐정이죠.
유카와 교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여러편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는 물리학 교수이고, 경찰이 그에게 협조를 구하는 방식으로 사건에 참여합니다. 비논리적인 추측을 비웃고 범인들의 트릭을 논증과 증거를 통해 깨트리는 '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진 캐릭터이기 때문에, 사전 지식 없이도 영화에 출연시킬 수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전부 이해를 하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갈릴레오란 캐릭터를 그대로 갖고 오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형사 민범(조진웅)이 이 모든 역할을 뭉쳐서 맡아버립니다.
이 선택이 영화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용의자 X는 범죄를 수사하는 영화이고 천재 수학자가 만든 단단한 미스터리를 푸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해결하는 또다른 천재, 소위 자강두천의 분위기가 나오면서 수학자(범인)쪽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풀리죠. 수학자(범인)의 성격, 범행동기 그리고 마지막 감정적인 흐름까지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이게 한국판에서는 덜컹거립니다.
형사 민범은 훌륭한 경찰이지만 갈릴레오/유카와 교수의 차가움과는 거리가 먼 뜨거운 감정적인 캐릭터입니다. 범죄수사 이야기 부분에 이런 감정적 캐릭터는 방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국판에서는 트릭을 푸는 긴장감이 많이 약했습니다.
| 없어진 헌신과 감정적 울림
단순히 범죄, 미스터리만 해결하는 내용은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용의자 X는 사건과 함께 풀리는 진실이 울림을 주는, 잘 만든 이야기입니다.
석고 덕에 화선은 범죄 용의선상에서 벗어납니다. 석고는 화선에게 마음이 있었고, 화선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석고는 경찰을 조심하고, 조용히 파고드는 성격이라 더욱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석고의 관심은 점차 스토킹으로 변질되어 갔고 화선에게 접근하는 남자에게 해를 가하려다 경찰에 잡혀서 그동안의 범행을 자백합니다. 경찰은, 석고를 추궁해 화선에게 집착하는 스토커의 살인으로 결론을 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탐정/형사의 눈에 진실이 드러나고 맙니다.
석고는 모든 살인사건을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잡혀갈 심산으로 스토킹마저 계획적으로 실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사건이 자신을 범인으로 종결되어야만 화선과 윤아가 진정으로 사건에서 벗어나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죠.
한국판 용의자 X는 감정적인 표현이 많은 편입니다. 석고의 성격도 좀 더 침울하고 어둡게 묘사됩니다. 외톨이에
수학만 알던 석고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화선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통해서 삶의 희망을 갖게 되죠.
서로에게 비추는 희망적인 빛을 볼수록, 관객은 살인을 저지르고 비극적인 결말을 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더 안타깝고 슬프게 느낍니다.
하지만, 일본 원작이 이런 감정의 흐름도 더 잘 잡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학교사인 이시가미가 수학을 좋아하고 열심인 모습에서 순수함까지 느껴집니다. 그런 그가 삶에 절망할 때 구원처럼 다가온 사람에 대한 사랑을 훨씬 설득력있게 전달한 것 같습니다.
문제 뒤에 숨겨진 진짜 문제라는 영화의 전체 이야기와도 잘 맞습니다. 알리바이 트릭처럼 보이지만 시체를 바군 트릭이고, 범죄영화처럼 보이지만 사랑영화인 영화인 것이죠.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냉정한 수사 아래에 숨겼다가 한꺼번에 터뜨려서 감정적인 홍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 점이 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느낍니다.
'용의자 X'는 환상적인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멋진 영화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함은 사라지고 과한 감정이 남은 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 X라는 수학적인 기호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했다면 좋았을 것 같았습니다.
일본판 '용의자 X의 헌신'은 원작의 분위기를 살려 잘 만든 영화라서 이쪽을 추천드립니다.